박쥐남부터 자르반 84세까지… 1호선은 어쩌다 ‘빌런’ 성지 됐나

신지인기자
업데이트 2022.04.09. 07:55




지난 4일 낮, 용산역을 지나는 1호선 열차에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올라탔다.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채 객차의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기부를 청하는 말 한마디 없이 발을 끌며 걷는 그에게 승객들 시선이 닿았다. 스마트폰에 열중하던 승객도 남성이 가까이 오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한 40대 여성은 “저기요”라며 남성을 멈춰 세우더니 천 원짜리 지폐를 바구니에 넣었다.

폭 2m가량 객차 내부 통로. 이 공간은 양옆에 앉은 승객이 집중하게 만드는 런웨이 무대와 같은 효과를 지닌다. 노호성 무대 연출가는 “버스나 기차와 달리 지하철은 승객의 시선이 중앙으로 모이기 때문에 통로가 하나의 돌출 무대 역할을 한다”며 “불특정 다수가 모인 대중교통은 군중의 탈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무대에 서더라도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했다.

승객은 강제로 관객이 된다. 김한신 백석대 문화예술학부 교수는 “앞에서 어떤 행동이 벌어져도 승객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일정 시간 열차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버스와 달리 흔들림이 적어 집중도도 높다”고 말했다. 그는 “정형화된 무대를 벗어나 극을 벌이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 기조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특이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관객의 스마트폰으로 녹화되고 소셜미디어로 퍼지며 2차⋅3차 재연되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48년 동안 서울을 이어온 중심축 1호선. 쉬지 않고 달려온 열차 안에는 온갖 민낯이 모인다. 김수박 작가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주제로 한 르포 만화 ‘사람의 곳으로부터’에서 ‘장미꽃 파는 아주머니’를 그렸다. 다짜고짜 승객에게 꽃을 내밀고 나서, 다시 한 바퀴 돌며 꽃을 수거하거나 돈을 받는 아주머니였다. 김 작가는 말했다.

“그를 빌런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전 다르게 보였어요. 혹시 저 아주머니가 ‘장미 백만송이를 선물해야만 그립고 아름다운 별나라로 돌아가는 외계인이 아닐까’ 하고요. 1호선은 원래 온갖 사람이 모여요. 이곳에 빌런이 왜 많을까 고민하는 것보다, 저 사람에게 어떤 사연이 있어서 저런 행동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는 편을 택했죠.”